[기고] 시멘트 공장 아래 행정·사법 마을 / 심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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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6.03.02. 오후 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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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여년을 ㈜동양시멘트로 출근해왔다. 근로계약서에 다른 회사의 이름이 적혀 있지만, 시멘트 제조의 핵심 공정을 담당하고 있는 나는 누가 뭐래도 ㈜동양시멘트의 직원이다. 이제까지는 온갖 차별과 열악한 작업환경을 버텨왔는데, 더는 안 되겠다. 내 회사를 찾아야지.’

노동자들은 감히 자신들의 진짜 사장을 찾기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2015년 2월, 중부지방고용노동청 태백지청이 ‘동일’ 및 ‘두성기업’ 소속 노동자들과 ㈜동양시멘트 사이에 묵시적 근로계약관계가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면서, ㈜동양시멘트로 하여금 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할 것을 명하였지만, 회사는 민첩했다. 태백지청의 통보를 받고 채 1시간도 지나지 않아 ‘동일’에 도급계약의 해지를 통보했고, 이를 이유로 ‘동일’은 소속 노동자들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결국 노동자들은 진정사건에서 이기고도, 직장을 잃었다.

해고된 노동자들은 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등 구제를 신청하고 법원에 근로자 지위의 확인을 구하는 소도 제기하였지만, 회사는 이번에도 노련했다. 노동조합의 단체행동이 있으니 업무방해와 공동폭행으로 엮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피고인 신분이 된 노동자들 앞에서 합의서라는 당근을 흔들어대는 것은 노조의 힘을 빼는 데에 매우 유효했다. 게다가 법원은 회사에 투항한 조합원들에게는 집행유예의 은전을 베풀고,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조합원들에게는 실형이라는 엄벌을 내림으로써 회사에 더욱 힘을 실어 주었다. 노동자들은 직장과 돈과 가정과 일상, 심하게는 목숨까지 잃었는데, 회사는 잃은 것이 거의 없다.

2015년 11월 내려진 중앙노동위원회의 부당해고 및 부당노동행위 판정도, 회사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고용노동부는 ‘묵시적 근로계약관계가 확인되어도 원청을 강제할 근거규정이 없다’는 오래된 핑계를 들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법원의 판결도 노동자에게 유리하게 내려질 것으로 보이지만, 회사는 무섭지 않다. 대법원에서 확정될 때까지 몇 해가 더 걸릴 것이고, 아쉬운 쪽은 하루를 더 버티는 것조차 힘든 노동자이지, 회사가 아니니까.

고용노동부는 스스로 묵시적 근로계약관계의 존재를 인정하고도, 법원이 최종적으로 판단하기 전에는 섣불리 회사에 강제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변명한다. 행정기관은 행정업무 수행을 위하여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이를 전제로 적법하고 타당한 행정을 구현해가야 한다. 법원의 사실인정이 있을 때까지 만연히 기다리겠다는 고용노동부는 행정기관으로서의 존재 의의를 포기한 것에 다름 아니다.

법원 역시 노동조합의 쟁의행위를 업무방해죄로 처벌하는 대법원 판례 뒤에 숨어, 같은 내용의 판결을 반복하고 있다. ㈜동양시멘트 조합원에 대한 판결문 중 ‘피해자가 처벌을 바라지 않으므로 집행유예’라는 내용과 ‘피해자가 강력한 처벌을 원하고 있어 실형’이라는 내용이, 각각 ‘노조를 탈퇴하여 회사에 투항하였으니 용서’와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되찾기 위하여 끝까지 싸웠으니 괘씸죄’로 읽힌다는 것을 정말 법원만 모르는가.

심재섭 변호사·민변 노동위원회

노동법은 대등한 당사자 간의 계약이 지켜지도록 강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힘의 축이 기울어진 노동현실 속에서 노동자에게 헌법이 보장하는 정당한 권리를 지켜주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고, 노동법 교과서 첫머리에 적혀 있다. 정부와 법원이 노동자의 편에서 투쟁할 것을 주문하는 것이 아니라, 법률의 취지에 따라, 법률이 적용되는 맥락을 꼼꼼히 고려한 정당한 법집행을 바랄 뿐이다. 기계적인 중립을 찾으며 자신들의 면책에만 관심을 두는 한, 정부와 법원은 예상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자본의 도구에 불과하다.

심재섭 변호사·민변 노동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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